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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 6:6-14)


이사야서 6장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선지자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이사야서 6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는데요.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모두 이렇게 이사야처럼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데, 이 경험이 모든 성도들에게 다 주어진 경험이 아니고, 모든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아주 예외적으로 아주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아주 특이한 경험이 이사야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똑같이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는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꽃 가운데서 만나주신 적이 있었고, 또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신비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명을 얻는 그런 특이한 경험들을 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지 않겠는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사실은 이 경험이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경험이 아니라, 아주 특이하고 아주 예외적인 그런 케이스로,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사모하고, 간절히 “하나님,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좀 보여주세요.” 하면서, 기도하면서 간청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로서는 그냥 평상시처럼 행동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특별하게 이런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이죠. 어느 날 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특권을 얻게 됐는데, 저 천상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어전 회의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모든 경험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험은 아니다”라고 하는 점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한 것과 같은 똑같은 방식으로 만나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시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꼭꼭 숨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미신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게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거짓 종교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 가짜 종교들 중에서, 거짓 종교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한 사람을 통해서나, 어떤 신비한 의식을 통해서나 어떠한 그런 구체적인 어떤 신비한 특이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주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꼭꼭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선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떠한 말씀을 해주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길 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죠. 온 세상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이해하겠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그 삶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매일 만나는 그 삶의 현장 하나하나를 보면서, 식물들을 보고 꽃들을 보고 동물들을 보고, 이 세상을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들이 느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교회에 오게 되면 우리 교회에 누가 왔다 가셨는가 종종 알게 됩니다. 종종 보면 누군가 청소를 해놓고 가셨어요. 또 아무개 권사님이 왔다 가셨구나. 교회에 오면 또 무엇인가가 옮겨져 있어요. 누군가 또 왔다 갔구나. 이곳에 올 때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무엇을 하고 갔는지, 여기서 기도하고 갔는지, 여기서 무엇을 만지고 갔는지, 그 흔적들을 보면서, 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오늘 왔었구나. 오늘 여기 와서 기도하고 또 청소하고도 갔구나. 또 이것을 만져놓고 갔구나. 그걸 느끼고 있는 거죠. 사람들이 왔다 가는 것만 해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이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흔적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걸 통해 하나님을 느끼며 체험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감아버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역사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아버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모른 척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그 손길들을 흔적들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마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바라보면서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을 느끼시고 경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어전 회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무슨 음성을 들었나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그런 메시지를 들려주신 것이죠.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 엄청난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라운 영광을 보여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냥 보고 좋으라고 보여준 게 아니라, 사실은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주시기 위한 거예요.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말은 뭐겠어요? “이사야야, 네가 갈래?”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네가 갈래?”하고 물어볼 때, 놀랍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그 순간에 대답을 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제가 있습니다.” 저를 불러 부르시고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명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사명에 따라 신실하게 사역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그 일들을 우리들 가운데 보여주시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가? 그것은 우리를 불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처럼 특이한 경험을 통해서 불러주실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 불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불러주시고 계시는데, 그때 우리가 먼 산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먼 산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무엇을 해야 돼요? 따라서 합시다.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소서.” 그런 대답을 주님께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찾으실 때, 우리들이 외면해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반응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수많은 일들을 남겨놓으셨는데요.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죄로 인해서 이 세상이 망가져버렸기 때문이죠. 망가져버린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고 계시고, 우리를 통해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고백해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강도 만난 한 사람을 보면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가 버린 거죠. 왜 지나가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누가 도와줄꼬?”라고 하는 그 부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그런 말씀 안 해준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거예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면서 그냥 지나가버린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무슨 음성을 들었어요? “누가 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줄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줄꼬?”라고 하는 그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활용해서, 그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싸매주고, 여관으로 데려가고 치료해 주면서, 그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엄청난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나요? 아무 말씀 안 하셨나요? 아무 말씀도 안 한 게 아니라, 믿음으로 귀를 여는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는 그 주님의 음성.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볼 때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사장들과 레위는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에 “주님 언제 저를 부르셨어요?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한다면 제가 도와줬을 텐데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말씀 안 하시니까, 못했는데, 말씀하셨으면 제가 했을 텐데, 제가 못 들었어요.” 아마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러나 부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귀를 닫아버린 것이고,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들을 망각해 버린 것이죠.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봤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의 그 요청을 깨달은 것이죠. 그리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완벽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셨는가? 완벽한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셨고, 완벽한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부르셨는데,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대시며, 그리고 그 사람을 깨끗하고 정하게 만드신 후에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파송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신 이유, 내가 이곳에 있게 된 이유는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저를 선택해서 이곳에 세워놓으셨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선택해서 우리의 자녀들의 부모로 만들어 주셨고,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고, 우리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불러주셨는데, 우리가 그냥 외면해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외면하며 무시하며 지날 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깊이 묵상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바로 이 자리에 내가 저한 곳, 그 자리에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가? 날마다 날마다 묵상하는 가운데 저희들의 믿음의 고백 가운데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고백하신 것이죠. 누가 이 죄인들을 구원해 낼까? 누가 이렇게 이 망가진 이 세상을 건져낼까? 누가 이 소망 없는 자들을 살려낼까?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고백하신 것입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 주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자리까지 오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셔서 피 흘리시고 씻기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마음속에 날마다 기억하며 저희들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길 가운데서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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