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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문 (전 12:13-14)

지난 주에 잠언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 주에는 전도서와 아가서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전도서와 아가사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해드리려고 하고요. 뿐만 아니라 다음 주와 그다음 주에 읽을 이사야서에 대해서도 함께 이 시간에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매월 마지막 주에 찬양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찬양 예배 때는 매주일 오후에 하고 있는 이런 성경 개요를 하는 것보다는, 일반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다음 주에 해야 할 이사야에 대한 개요도 오늘 이 시간에 함께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다음 주에도 이사야서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기는 하겠지만, 성경 개요가 아니라 일반적인 메시지를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고요. 그래서 오늘은 전도서와 아가서, 그리고 다음 주에 읽을 다음 주와 그다음 주에 읽을 이사야서 이렇게 세 성경 말씀에 대해서 함께 개요를 살펴보고, 우리 성경을 읽고 가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전도서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우리가 전도서를 읽다 보면 혼란스럽습니다. 뭐라고 할까? 이 전도서의 말씀은 염세적인 그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전도서의 말씀을 보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헛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는 내용이 전도서의 메시지인데요. 무슨 말입니까? 의미 없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염세적인 메시지를 듣게 될 때, 과연 이게 성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성경에서 이런 염세적인 메시지를 읽는다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일까?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헛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이죠. 심지어 무엇도? 고난도 어려움도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고통과 슬픔들도, 이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심지어 악인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그 적당하게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의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이 전도서에서 나오는 염세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통해서 살펴보는 메시지와는 정반대 되는 것 같아서, 약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가 바로 전도서의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염세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해야 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 성도들의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왜 전도서에서는 이런 염세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헛되니까 그냥 다 포기하라는 말일까요? 헛되니까, 이 세상의 삶을 살 의미가 없다고 하는 말일까요? 헛되니까, 이 세상의 삶 더 이상 유지시킬 필요 없고, 다 끝내버리자. “자살이라도 해버리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일까요? 그게 아닌 것이죠.

우리가 전도서의 메시지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러니까 헛되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런 삶의 목적도 가치도 없고, 그냥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참 부질없는 짓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겁니다. 사람들이 쫓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영화를 쫓아가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명예를 쫓아가는 것이죠. 성공하는 것을 위해서 쫓아가는 것이죠.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을 위해서 쫓아가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다 갈망하는 그 모든 것을 향해서 쫓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 전도서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뿐만 아니라 이 전도서의 메시지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살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전도서의 메시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동시에 이야기하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축복의 삶,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을 감사하면서 누리면서 살라고 하는 그런 권면의 메시지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동시에 보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전도서 3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깨달았도다” 알았도다. 그러니까 전도서의 메시지가 전부 염세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가 동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전도서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점을 주안점을 두고서 읽어야 되는가? 그것은 첫 번째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참 어떤 상태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는 선하게 창조하셨어요.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이죠. 정말 행복한 장소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땠더라”라고 선언하고 계시죠? 좋았더라 선언하고 계셔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고, 이 세상 더러운 거, 이 세상 정말 안 됐다, “정말 좋지 못하다”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정말 좋다고 그렇게 선언해 주실 정도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신 거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가 하면 좋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참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화가 나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망가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의 명령을 배척해 버리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척해 버리고 선악과 이 세상의 것을 갈망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그것을 갈망하면서 살게 될 때, 결국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었는가? 망가진 세상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땅은 우리를 위해서 아름다운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라, 엉겅퀴를 내며 가시를 내며,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만 사는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것을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도서의 말씀에서 헛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져 있는, 처음에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정말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우리를 정말 처절하게 만드는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전도서를 읽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고, 이 무의미한 일상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하면서,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결국에는 아름다운 저 천국에서 정말 주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그런 기쁨의 날을 소망하면서, 이 전도서의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전도서 12장 13절, 14절의 말씀이 바로 전도서의 결론이죠. 전도서 12장 13절 말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에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하게 살면 결국 심판을 당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종하며 사는 그런 삶을 사는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은 아가서의 말씀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아가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이 시가 바로 아가서의 말씀이라고 하죠. 예전에 아주 남녀유별이 아주 심했을 때, 이게 누구의 이야기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납니다마는, 양주동 박사라고 하는 분이었던가요? 국어에 아주 탁월한 그분이 있었는데, 여학교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서, 여학교에다가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를 보내면 그 여학교에 사감 선생님이 그 편지를 일일이 검열해 가지고 연애편지는 통과를 안 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어떻게 했는가 성경 구절들을 다 적어가지고 보냈어요. 그랬더니 사감 선생님 보니까 성경 구절이 성경 구절만 쓰여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전달해 준 거죠.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그 여학생이 그 성경 구절을 찾으니까 아가서의 말씀이에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연애를 했다고 하는 재밌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이 아가서의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책이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아가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진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아가서도 성경책이냐? “아가서도 과연 성경에 포함되는 책이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졌죠. 왜냐하면 이 아가서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기만 할 뿐이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도 나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과연 이게 성경책일까?”라고 하는 그런 의심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사실은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죠? 그리스도의 신부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신랑 되신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보면 솔로몬이라고 하는 그 왕이 정말 하찮은 별 볼품없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신부로 맞이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과연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사실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이 씻기시고, 주님의 신부로 삼아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이 아가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하나님과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아가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다음은 이사야의 말씀을 우리가 같이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이사야라고 하는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인 BC 한 700여 년 경에 활동하던 선지자가 이사야 선지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그 기간을 한번 그림으로 한번 보여주고 싶은데요. (제가 설명할 동안 이 그림이 그대로 그냥 있으면 좋겠습니다.) 웃시야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주전 791년부터 유다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웃시야라고 하는 왕은 그런대로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말년에 이 웃시야 왕은 52년 정도 통치를 한 왕인데 말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병에 걸려서 죽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대체로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가 디글랏빌레셀 3세라고 하는 왕이 등극해서 세력을 막 확장해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웃시야 말년에 이스라엘의 성왕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고, 또 부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그런 참 좋지 못한 상황 가운데 있었을 때, 그때부터 웃시야 말년부터 시작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요담이라고 하는 왕과 아스라고 하는 왕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도 요담과 아하스 시기도 웃시야 말년과 크게 다름이 없는 그런 시기를 보내는 가운데, BC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 사마리아 성이 함락을 당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전에 북이스라엘과 아랍 나라가 남쪽 유다를 침공하러 왔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스 왕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을 신뢰해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아하스 왕은 그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결국에는 나라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앗수르의 지배 가운데 있게 되는 그런 시기를 겪게 된 것이죠.


그 뒤에 히스기야 왕이 등장해서 종교개혁을 하고 사회 개혁을 시도하면서 앗수르 나라와 이렇게 싸우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유다 민족이 이기게 되고, 오히려 앗수르는 멸망을 당하는 18만 5천 명이 죽임을 당하는 그런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던 왕이 히스기야 왕인데, 그때까지 활동했던 선지자가 이사야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므낫세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사람은 결국 앗수르 나라에 종속당하게 되고, 므낫세의 왕은 아주 나쁜 왕으로 성전 마당에 이방 신상을 세우기도 하고 자기 아들을 이방신에게 드리기도 하는 등, 그렇게 참 나쁜 왕으로 활동하다가 그 므낫세 왕이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토보로 갈라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왕인데, 아무튼 이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말부터 시작해서 문화새 초기까지 활동하던 선지자가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치워줘 되겠습니다.)

이 이사야서를 보면 1장에서부터 39장까지는 유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게서 많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40장에서부터 66장까지는 위로의 메시지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 앞부분은 심판의 메시지, 40장 이후부터는 위로의 메시지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장을 우리가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는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을 방문할 때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된 거죠. 그 환상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누구냐?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보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찬양하는 그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구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는 그 환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때 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사명을 전할 그 사명자로 세워주시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의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라고 하는 고백이죠. 이사야서 6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아요. 내가 그런대로 좋은 줄 알아요.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내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줄 깨닫게 되는 거죠. 내가 죄인인 줄 아직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사야 선지자를 정결하게 해 주시고 그리고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이사야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이사야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만 선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로 인해서 완전히 망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무엇을 남겨놓을 것이다? 그루터기를 남겨놓아서, 그 그루터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받게 된 것이죠. 아무튼 그 앞에 부분까지는 전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이사야서 40장에서부터는 위로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 왜냐하면 심판을 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고 하면 어떤 질문인가요? “이방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능력 있는 신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런 질문들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유다 민족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대답이 이사야서 40장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0장 10절과 1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10절, 11절 말씀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무슨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유다 민족이 끌려가게 되고 패망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셔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목자가 되어 주실 거다”라고 하는 위로의 메시지 약속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사야 40장의 말씀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까? 구원해 주시는 방법 그것은 이사야서 53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53장의 말씀은 뭐예요? 5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죄로 인해서 타락해 버린 민족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는 하셨지만, 그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다. 회복시키실 거라고 하는 약속이 포함돼 있고, 그러면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는가? 그것은 고난 받는 종을 통해서, 우리 대신에 주님께서 대신 피 흘리시고 우리를 씻어주시고 구원시켜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의 메시지까지 기록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7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오실 거라고 하는 그 구원의 약속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그다음 주 이렇게 석 주간에 걸쳐서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 아들을 주셨다고 하는 그 메시지들을 구약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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