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가장 어려운 시험 (창 22:11-12)

오늘 우리가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가 오늘 이 저녁에 넘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 거듭나게 되고,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고 하는데, 태어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다음에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날마다 성장해야 할 텐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또한 여러 가지 시련과 아픔들을 겪으면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온실 속에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우리 자녀들도 그냥 온실에서 기르듯이 그냥 보호만 한다고 한다면, 이 아이가 나중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에 나갔을 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우리가 성장하는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기도 하고, 또 테스트를 겪기도 하면서, 그래서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믿음도 역시 그냥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시련과 또 시험, 또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 나간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통과하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험을 겪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신 다음에, 우리가 크게 믿음이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길을 인도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고, 또 시련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죠?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생각이 나죠?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고, 또 자식도 잃어버렸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정말 엄청난 재난을,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이 욥이 얻게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주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다. 내가 이 시련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통과한 다음에는, 내가 정금과 같은 그런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창세기 22장의 말씀 가운데 일부를 읽었는데, 바로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시험의 과정 실현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자녀와 함께 이삭과 함께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정말 좋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죠. 이러한 명령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가 있을까요? 아마 힘들 거예요. 저도 힘들어요. 저도 못할 것 같아요. 자녀를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을 때, 그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순종해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거기서 자신의 아들을 칼로 잡아서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산으로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2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고민이 없었을까요? 갈등이 없었을까요?

성경에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마 그 마음 가운데 분명한 갈등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인간이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을까? 내가 다른 명령은 듣는다고 할지라도, 이 말씀만은 도무지 순종할 수 없을 거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갈등들이 아마 그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후에 결국 아브라함은 어떠한 결론을 내렸냐면,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죠.

우리가 갈등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갈등이 있을 수 있겠고, 여러 가지 고민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갈등과 고민 가운데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죠.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명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고민하지만, 그러나 “그 결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놀라운 결단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정말 놀라운 것이고, 그 믿음이 정말 대단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 말할 정도로, 정말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아브라함은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부터 19절의 말씀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이겠죠. 아브라함이 고민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네 독자 이삭을 통해서 네 민족을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신 약속이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이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이삭을 내가 번제로 드렸다고 한다면, 죽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살리셔서, 그래서 이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거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 순종을 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히브리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사랑의 하나님인 거예요. 그 옛날 저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아무런 정책 없이 살아가고 있던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이끌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던 그 하나님이시고, 애굽에 갔을 때 그 가정을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이고, 모든 순간순간마다 함께하셨던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그 하나님을 지금까지 믿고 신뢰하며 살아왔을 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후회가 아니라,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오히려 기쁨이 있고, 오히려 승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 따를 수 없을 것 같은 이 위험한 정말 너무나도 무서운 이 시험, 가장 어려운 시험을 만나게 되었을 때도, 물론 고민은 했겠지만,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믿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결국에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 아들을 드릴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히브리서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사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내게 바쳐라”라고 하는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문제이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해주신 그 말씀의 그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 이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아브라함이 이해하지 못할 문제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갑니까? 예를 들어서 산수를 하고 수학을 할 때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으면, 그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 풀 수가 있죠? 이 문제를 접근하는 기본형 문제를 공식을 생각하면 돼요. 방정식을 생각하고 덧셈 뺄셈을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을 해서, 이 문제는 이 공식을 대입하면 되겠구나. 이 문제가 어떤 공식을 묻는 문제구나. 어떤 방정식을 묻는 문제구나. 그것을 알게 되면, 그 복잡한 문제도 풀 수 있는 것처럼, 수능을 볼 때 수학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비비 꼬아놓은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문제가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 그동안 배웠던 공식들을 응용하는 문제지 배우지 않은 문제를 내는 법이 없거든요. 배운 문제 그 배운 공식 배운 그 기초를 응용해서 적용하는 문제들이 나온 것이지, 그 공식이 없는 문제가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수학을 잘 푸는 사람은 어떻게 잘 풉니까? 그 공식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이 공식을 이 문제에다가 어떻게 대입해서 풀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 이게 어떤 공식 문제구나. 금세 깨닫게 되면,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죠.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셨던 이 시험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고, 우리가 따르기 어려운 시험 문제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라고 하는 이 문제는 정말 우리가 납득하기가 어려운 문제죠. 하지만 이 문제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이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아주 간단한 문제예요. 어떤 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묻고 계시는 겁니까?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느냐?” 그것을 묻는 질문인 것이죠.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느냐?”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씀을 하시면서, 너, 네가 재물을 좋아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네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네 명예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쩌면 이 말씀은 늘 우리가 듣던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갑자기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늘 들려주시는 말씀,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니, 너희들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늘 들려주고 계시는데, 그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너를 위해서 몸버려 피 흘려주었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우리 주님께서 해주시는데, 그 질문을 약간 응용해서 내 아들을 나에게 바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진 것이죠.

그러한 질문을 들었을 때 이 아브라함은 이 문제가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제일 사랑하느냐? 제일 사랑하지 못하느냐의 질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합니다.” “주님이 내게 가장 소중합니다.” 그 고백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자식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그 자식을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된 것이죠.

이 아브라함이 자식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할 때 천사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아브라함을 막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말씀하셨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해 놓으시고, 정작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이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런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해놓고 왜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그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배고파가지고 아이고, 오늘은 배고픈데, 사람 고기 한번 먹어보자. 그러면서 이삭을 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테스트해보려고 하는 거죠. “아브라함아, 너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냐? 네 아들이냐?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냐? 네 아들이 가장 소중하냐?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물으신 것이고, 그때 이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보다, 심지어 내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한 줄로 믿습니다.

저도 종종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아이들을 시험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3살, 4살, 5살 뭐 초등학생 이럴 때 우리 아이들이 맛있는 과자를 막 먹고 있으면, 제가 가서 그 과자 먹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얘야, 네가 먹고 있는 거 정말 맛있어 보이는구나. 아빠 좀 줄래?”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 큰아이한테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우리 큰아이가 뭐라고 얘기한 줄 압니까? “아빠, 돈 있잖아. 아빠가 돈 주고 사 먹어.” 우리 큰아이는 똑똑해서 제가 돈이 있는 줄 알아요. 근데 우리 둘째 아이에게 물었어요. “얘야, 그거 아빠 좀 주면 안 돼?” 했더니 이 아이가 먹으려고 하다가 중단해 버리고, 제 입에 집어넣어 주는 거예요. 얼마나 감동이 되든지, 너무나도 기뻤지만, “괜찮아. 괜찮아. 너 먹어.” 먹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고, 먹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냥 얘가 나를 주나 안 주나 그냥 알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 이 아이가 먹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아니야 괜찮아. 안 먹어도 돼. “네가 먹어” 그랬더니, 우리 아이가 “아니야 아빠 먹어.” 그러면서 그랬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날이라고 미국은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이렇게 따로따로 있어요. 5월달은 어머니 날, 6월달은 아버지 날, 그래서 아버지 날이어서 미국에서 이 두 아이가 마음을 다해가지고 조그마한 선물을 보내줬는데, 그걸 받고 얼마나 감사한지 이 아이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있구나. 그걸 느꼈는데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빼앗아 버리고,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버리고, 아브라함을 괴롭게 만들어버리고, 그리고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아브라함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면서, 아브라함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묻기 위해서 이것을 물으셨는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것이죠. “하나님, 내가 주님을 제일 사랑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서 내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내 아들, 내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나님께서 시험 출제를 낼 때는 “네 아들을 내게 바칠 수 있겠니?”라고 물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응답을 보시고 채점하시면서는 뭐라고 채점하셨냐면, “네 아들을 잘 바쳤으니까, 합격”이라고 채점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하면서 합격점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바라보시고 합격점을 주게 된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도 같은 문제를 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늘 우리에게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명예와 자존심,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내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게 내 마음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나의 명예고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그 어떤 조그마한 이익이고, 나의 조그마한 그것이 가장 소중해서 하나님을 오히려 내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하나의 다른 신약의 어떤 인물을 대비시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로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관원의 이야기입니다. 한 관원입니다. 어떤 젊은 관원이 어느 날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물었어요. 주님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하는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보시면서 질문을 던지셨어요. 성경에 뭐라고 쓰여져 있니? 율법에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 하시면서 물어보시는 거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너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이 청년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예수님 앞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겁니다. 네 이러한 계명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서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죠.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이 청년이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해 온 것이 그런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다시 한번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갑자기 교과서에 안 나오는 질문이 나오니까, 이 청년이 당황스러웠어요. 아니 주님 성경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는 그런 말 없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것은 성경에 있었지만,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그렇게 하라고 하는 얘기는 성경에 없는 얘기 아닙니까? 이 청년이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면서, 그리고 이 청년이 그 예수님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그냥 되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던지신 질문이 무엇입니까? 이 청년에게 던지신 질문은 사실 제1계명이에요. 제1계명이 무엇이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잊게 하지 말지니라.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이 아닌 그 어느 것도 내가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십계명의 제1계명의 말씀이 그 말씀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던지실 때 만일 이 청년을 향해서 너는 하나님만 섬겼느냐? 제1계명 가운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두지 말지니라고 말씀했는데, 너는 이 말씀을 지켰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으면, 이 청년은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네 저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만 섬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살짝 꼬아서 응용문제로 만들어서, 그래서 이 청년에게 질문을 던지신 거죠. 너에게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너의 신이냐? 돈이 너의 신이냐? 너는 돈을 믿고 있느냐?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 그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의 그 질문 앞에서 이 청년은 사실 돈이 우상이었던 거예요. 돈을 믿고 돈을 신뢰하고 돈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래서 살았던 이 사람은 그 돈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청년은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죠.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기본형 문제들만 잘 알고, 그것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형 문제들이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잘 적용되어서 응용되어서 순종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그 질문을 내 아들을 내게 바칠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처럼,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는 그 질문에 그 응용 질문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결단과 고백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그냥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있는데, 그냥 이 말씀을 그냥 읽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그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응용하는지 응용을 할 수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에요. 오늘 나와 내 아내와의 관계에서 내 남편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아니 우리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 직장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아니면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에 대한 관계에서 나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원수와의 관계에서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일이 어떻게 적용해 나갈 수 있는가가 그게 진짜 믿음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예, 사랑합니다.” 이야기해 놓고, 실제로 우리가 나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입으로는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전혀 믿는 게 아닌 그런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 청년은 그런 점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입술로만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던지신 그 심각한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질문 때문에 하나님을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 청년은 그런 심각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그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한낱 허울 좋은 그냥 말 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드러난 청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제가 목회하고 있었을 때 제가 시무하던 교회 이름이 “사랑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교회 목사님들끼리 모여 앉아가지고 농담을 주고받는데, 서로 이런 농담 저런 농담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툭 말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보통 교회 이름하고 교회 실제하고는 정 딴판으로 간다고 그럽디다.” 그래요. 누가 그러니까 다른 목사님들이 “맞아요. 맞아요.” 막 박수를 치면서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일 먼저 공격을 당한 교회가 어느 교회겠습니까? 사랑의 교회인 거죠. “사랑의 교회에 가면 사랑이 없다더라.” 연합교회는 늘 싸운다더라. 제각각이래더라. 기쁨의 교회에는 슬픔밖에 없고, 절망적이고, 소망교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더라. 그러니까 막 서로 목사님들끼리 농담을 하고 막 즐겁게 재밌게 노는데, 딱 어떤 목사님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사랑의 교회 사랑이 없는 건 그런대로 봐주겠는데, 영생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그랬더니 영생교회 목사님이 얼굴락불가락하면서 “아니, 그러면 안 되죠. 그러면 안 되죠.” 재밌게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제가 잠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는데, 낮에 농담을 주고받았던 그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어떤 말이 생각이 나냐면 “사랑의 교회에 사랑이 없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 만한데”라고 하는 말이에요. 근데 그게 봐줄 만한 게 아니에요. 영생이 없으면 그게 심각한 문제지만, 사랑이 없으면 괜찮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신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냥 우리의 삶 가운데서 사랑이 없어도 그게 괜찮은 게 아니라, 사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다 적용되고, 다 그 사랑이 나타나야 되고, 믿음이 등장되어야 되고,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그 어느 한 평 한 인치도 상관없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믿음이 다 적용되어 응용되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거짓말일 수밖에 없고 위선 된 믿음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한다면 아멘 할렐루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 믿음이 이제는 우리 며느리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돼요? 사랑과 은총으로 자비로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고 정말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돼요?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마치 주님을 대하듯이, 어떤 사람을 만나도 주께 하듯, 모든 면에서 그런 게 나타나야 그게 진짜 믿음인 것이지, 교회에서는 기도하고 참된 믿음인 것처럼 보이면서, 남의 돈을 떼먹고, 욕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한 일을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믿음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한다면,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믿음들이 그대로 그대로 드러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역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을 만난다면 그때는 우리는 간단한 문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의 처방전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죠.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문제들은 아주 간단한 기본형 문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이죠. 과연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내 명예가 더 중요한가?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내 의견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중요한가?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그렇게 우리의 마음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복잡한 문제들이 사실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가 왜 생겨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말씀에 아비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은 사랑을 적당히 혹은 조금만 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사랑을 충분히 해야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자식이 우상이 되고, 가족이 우상이 되는 그런 단계까지 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가족 사랑하는 것이 더 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랑을 우리 주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묻기를 네가 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그 주님, 네가 이 세상에 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그 주님께서, 사실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로마서 5장 7절 8절 말씀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서 먼저 내어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묻고 계시는 거죠.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묻고 계실 때, 그때 아멘,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