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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잠 1:1-7)

이제 시편 읽는 말씀이 끝났고요. 내일부터는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읽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의 잠언서의 말씀, 참 생각을 깊게 하게 만들고, 깨달음을 주는 그런 고귀한 말씀들로 가득 차 있는 성경책이 바로 잠언서의 말씀인데,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에게 영적인 지혜, 영적인 그러한 깨달음들이 우리 성도님들 삶 가운데 많이 넘쳐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잠언으로 구성된 말씀이죠. 여러 가지, 글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시가 있는가 하면, 이야기가 있고, 편지가 있고, 또 어떤 법률 문서 같은 것들도 있고, 여러 종류의 글들이 있는데, 잠언은 어떤 책인가? 마치 속담이나 경구 격언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말씀이 잠언서의 말씀입니다. 이 잠언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아주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짧은 그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 잠언인데, 이 짧은 말씀들이 길이는 짧지만, 우리들에게 주는 그 영향력은 굉장히 깊고,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지게 만드는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자고로 길면 별로 효과가 없어요. 그래서 짧으면 짧을수록 우리에게 기억에 남게 되고,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인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그런 말씀이 짧은 경구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서 어렸을 때부터 습관을 잘 들어야, 그래야 그 습관을 잘 기르고 바른 삶을 잘 교육을 잘 시켜야, 그래야 “그 사람이 어렸을 때 배운 그것이 늙어서도 그 평생에 그 사람의 길을 바르게 인도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속담 한마디, 경구 한마디를 던지는 게 훨씬 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와닿는 것이죠. 무슨 말이 있습니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그런 얘기를 한 번 던져놓으면, 아. 그렇구나. 어렸을 때 바늘 도둑을 하게 되면, 결국에는 커서 소도둑이 될 수 있겠구나. 어렸을 때부터 정말 바른 삶을 살아야 되고, 어렸을 때부터 참 제대로 잘 사는 삶을 훈련시키는 것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고, 그 사람의 평생의 길을 인도한다고 하는 그런 교훈을 주기에 아주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여러 가지 표현들 가운데, 이 잠언 격언 이런 표현들은 정말 우리들에게 가슴속에 깊이 박히게 되는 그런 표현들이 바로 이런 격언의 말씀 잠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을 때,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들의 삶이 정말 옳은 길로 갈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아주 좋은 말씀이 잠언서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잠언서가 이렇게 한 달에 한 장씩만 읽어도, 이렇게 한 달에 하루에 한 장씩만 읽으면 1년에 12번 읽어가면서 잠언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이 잠언서를 매일매일 한 장씩 읽어나가면서, 1일에는 1장, 2일에는 2장, 3일에는 3장 그렇게 읽어가면서 잠언서를 늘 가까이하면서, 묵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잠언서의 말씀 우리 어른들이나 우리 자녀들이나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면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튼 이번 한 주간 동안에는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난점이 존재합니다. 어려운 점이 존재하는 것이죠. 어떤 것이 어려운 점입니까? 그것은 이 짧은 표현의 격언 같은 것들은 그 배경이나 문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이해할 때 비로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고 했을 때, 이걸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솥뚜껑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그 말이 제대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언서에 있는 이 표현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의 문화와 관습 이런 것들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머리에 숯불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표현이 잠언서에 나오는데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원수에게 오히려 사랑을 베풀고, 원수에게 선하게 베풀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이 표현, 아마 유대인들 아주 오래전에 살던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았겠지만, 오늘날에는 과연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이해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당시의 문화나 이런 역사적인 배경 이런 것들을 잘 공부하게 될 때, 이 잠언서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잠언서의 특징, 잠언서의 성격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말씀들을 우리가 다 똑같이 생각하면 해석하는 데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율법의 말씀들이 있는데요. 계명의 말씀들이 있죠. 그러니까 이 계명의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 계명 법칙 이런 걸로 이해하면 되는데, 그런데 이 계명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다른 장르로 되어 있는 글들은 그 장르에 맞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지난 시간에 편을 시편을 살펴봤는데 시편을 넉 주간에 걸쳐서 읽었는데, 시라고 하는 특별한 그 특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시를 우리가 볼 때는 “아, 이게 시적인 표현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감안해서 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시적인 표현이구나”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하늘이 노래하고” 뭐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렇게 하면, 이게 정말로 하늘이 정말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어떤 상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구나”라고 이해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잠언을 이해할 때도 이 잠언의 성격을 잘 알고서 이해해야 되는 거죠. 편지글은 편지글의 형식을 잘 이해해서 이해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은 어떤 것인가?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계명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계명은 뭡니까? 계명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계명인 것이죠. 법칙인 것이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잠언은 무엇입니까? 지혜의 말씀이에요. 지혜의 말씀은 율법의 말씀하고는 조금 달라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잠언서에 보면 무슨 말씀이 있냐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서 26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어리석은 자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얘기를 할 때, 자꾸 대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요즘 제 아내가 제 말을 대답을 안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상당히 헷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말씀인 잠언서 26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말을 하면, 대답하지 않을 게 아니라, “대답해라”라고 하는 말이 잠언서 26장 5절 말씀에 있는 것이죠. 26장 4절과 5절 바로 앞뒤에서 미련한 자가 말을 하면 그 말에 따라서 대답을 하지 말라고 4절에 돼 있고, 그 대답을 하라고 하는 말이 5절에 있는데 대답을 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예 이게 성경이 모순인가요? 왜 이런 이렇게 정반대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잠언의 말씀이 율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계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계명은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말라. 그러면 도둑질하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하지만 잠언의 말씀은 무엇인가? 잠언의 말씀은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고, 저런 상황 가운데서는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잘 기억하면서, 대답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대답을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대답을 안 하는 게 저를 무시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잠언서의 말씀은 계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의 말에 따라 대답하는 것은 어떠한 위험이 따를 수가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말에 따라 대답하지 않는 것은 또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대답해야 하고, 어떤 때는 대답하지 않아야 되고, 그런 것들을 지혜롭게 분별해 가면서, 우리가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 교회에 새 교우들이 종종 방문하고 있습니다. 제 설교가 좋아서 방문하는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고, 주차장이 넓어지니까 사람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오는데, 그런데 그때마다 우리가 그 새교우들을 어떻게 환영해 주고, 어떻게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이 좋을까요? 어떤 사람의 경우는 환영한다고 하고 관심을 가져주고, 그리고 이렇게 접근해 주면 도망가버려요. 근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도망갈까 봐, 좀 조심조심하고, 그래서 혹시 도망가면, 부담 줄까 봐, 조심스럽게 이렇게 했더니, “아이고 이 교회는 사랑이 없네” 하고 또 가버려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그걸 지혜롭게 분별해서, “아, 이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구나.” “이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기다려줄 필요가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잘 분별해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잘 분별해서 접근을 해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그마다 우리 이 세상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예요. 큰 애와 작은 애가 어쩜 그렇게 성격이 다른지, 완전히 달라서 얘한테 해주는 방식과, 이 아이에게 해주는 방식이 완전 다르게 하지 아니하면, 그러면 오히려 똑같은 일을 해놓고도 반응이 정반대로 나오게 되는 황당한 상황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텐데, “세상이 왜 이래?” 하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지혜롭게 그 모든 것들을 적절하게 잘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사람마다 잘해야 되는 것인데 이번에 어떤 새 교우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교회에 오니까, 참 이 교회는 나를 존중해 주고 기다려주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고마웠다고, 가까이 오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 미묘한 그 사이를 적절하게 해서 대응을 해줬어요. 새 가족팀이 그랬더니, 그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것을, 이 잠언의 말씀들을 우리가 무식하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잠언서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그 상황에 따라서 대답할 건 대답하고 대답하지 않을 건 대답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서의 말씀은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적용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잠언서의 말씀들이 마치 어떤 교과서인 줄로 생각하고,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잠언서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이 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거죠. 우둔한 자의 손에 들린 정말 화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잠언서 13장 24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 말씀이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교회 성도님들에게 무분별하게 부모가 자녀들을 폭력적으로 다루고, 자녀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데, 면죄부를 주는 잘못된 말씀으로 이용되는 적이 너무나도 많았어요. 이 말씀을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의 의미가 그러니까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무조건 때려서라도 교회에 데려와야만 하고, 자식들을 무조건 징계를 해서라도 무섭게 해서라도 그래서 자녀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면죄부처럼 그렇게 작용하게 될 때, 이 잠언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이 아니라, 재앙의 말씀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26장 9절의 말씀에 보면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언을 들었는데, 잠언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데, 미련하게 적용하고, 미련하게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다 다르고, 모든 상황이 다 다른데, 그 사람에 대해서 분석해보지 못하고, 접근해보지 못하고, 정말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우리 자녀가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채, 그냥 잠언서의 말씀을 듣고서,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접근해 버리면, 그 잠언의 말씀이 복된 말씀이 아니라, 술 취한 자가 가시나무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것과 같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이 잠언서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는 하지만, 이 유익의 말씀이 우리가 분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잘 못해 가지고 지금 와서 깨닫는 거예요. 지금 와서 애들 다 떠나고 난 다음에, 우리 우리 교회의 젊은 세대들은 그러지 말기를 위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잠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의 말씀은 특별히 잠언서 1장 1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이 잠언서의 서론이며 핵심격인 말씀입니다. 잠언서 1장 1절에서부터 7절 말씀. 다시 한번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오.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1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이 잠언서의 서론 격이며 또한 잠언의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잠언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잠언의 목적은 지혜롭게 하기 위한 것이죠. 듣고 깨닫게 만들기 위한 말씀이 잠언인 것이죠. 슬기롭게 지혜롭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말씀인데, 이 잠언서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 잠언서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7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지혜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지혜가 뭐냐? 지혜는 다른 사람들보다 영리하게 꾀를 내서 뭔가를 편리하고 더 유익을 얻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그러한 얄팍한 지혜를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핵심이라는 거예요.

경외가 뭐예요? 경외. 성경 말씀에 이렇게 우리가 평상시에 안 쓰는 단어가 있어가지고,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데, 경외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두려워하는 거예요.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아는 게 그게 지혜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에 죄를 안 짓는 게 지혜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지혜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게 지혜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요셉이 그 보디발레 아내의 유혹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악을 행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지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언서의 말씀이 무엇인가? 그 수많은 말씀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지혜의 말씀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서 잠언서는 여러 가지 축복의 말씀, 우리를 향해서 주는 여러 가지 성공의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그 아이가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약속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이런 식의 약속들이 많습니다. 의롭게 살면 복을 받을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장수할 것이다. 부지런하게 살면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부자가 될 것이다. 게으르게 살면 망하게 될 것이다. 등등 우리가 어떻게 살면 어떻게 지혜롭게 살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선하고 좋은 결과 부자가 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장수하기도 하고 땅을 차지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런 삶을 살게 되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들이 잠언서에 보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잠언서 10장 4절 말씀도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러니까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의 원리를, 이 잠언서를 보면서, 성공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부지런해야 된다.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된다.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부모를 존경해야 된다. 존중해야 된다. 의의 길을 걸어가야 된다. 이런 일종의 도식을 우리가 이끌어내고, 그 도식을 설교하기도 하고 그 도식을 자꾸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서에 나오는 이 축복의 말씀들, 약속의 말씀들은 하나의 공식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우리는 늘 이과적인 성격이 그런 특성이 많아서, 공식을 너무나도 좋아하죠. 1 더하기 1은 2 2 더하기 2는 4 이렇게 숫자로 대입하면 숫자로 정확한 답이 나오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는 그런 성격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장수할 것인가 장수의 비결이 뭐예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거. 그렇게 자꾸 도식을 뭔가 공식을 성경에서 추출해내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말씀들이 사실은 그런 공식 도식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어떤 것들을 많이 봅니까? 정반대의 경우가 더 많아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다 잘 되고 떵떵거리면서 살고, 편안하게 장수하면서 사는 사람들 많이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덜 되는 경우도 정말 많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는 이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성경 말씀이 잘못됐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는 그런 관점을 보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 시각을 가져야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받을 수가 있겠고, 수고하고 애썼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겠고, 정말 내가 신실하게 살았지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겠고, 이 세상에서는 그냥 모든 것들이 다 숲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축복의 말씀들, 약속의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영원한 복이며,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에게 “잘했다” “충성했다” “충성된 종이다”라고 칭찬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영원의 관점을 바라보며 이 말씀을 우리가 읽고 묵상하고 또한 적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지혜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정말 이 하나님의 말씀 잠언의 말씀대로 우리가 잘 살 수만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그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오셔야만 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고,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면서 주님께 소망을 거는 그런 성경 읽기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잠언서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큰 영적인 유익, 삶의 지혜, 그리고 기쁨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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