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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내리사 (시 90:13-17)

계속해서 우리가 시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요. 성경 말씀 전체가 다 좋지만, 특별히 시편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와닿는 것 같아서, 이번 주간에 성경을 읽는 게 훨씬 은혜가 많이 되는 주간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 시편 마지막을 이제 이번 주에 읽게 되겠는데요. 시편 119편에 가면 좀 길어서 좀 길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중단하셨던 분들도 예전에 중단해서 못했던 것들은 그냥 잊어버리시고, 앞으로 나오는 부분만 다시 다 읽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읽으셔서 성경을 계속해서 묵상해 나가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시편이 총 150편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시편 150편이 5권의 책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1권, 2권, 3권, 4권, 5권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지난주에 1권과 2권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드렸는데, 오늘은 3권에서부터 5번까지의 내용을 또 간략하게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2권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 72편에서는, 이제 장차 오실 새로운 왕, 의로운 왕이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왕이 오셔서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고 하는 기대가 2번 마지막 72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편을 읽어나가면서, “이제 새로운 왕이 오시겠구나” 기대하면서 우리가 제3권을 시편의 제3권 쪽을 넘어가게 되겠는데, 3권은 73편에서부터 89편까지가 제3권의 말씀인데, 제3권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시편 73편에서는 아주 절망적인 그런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은 악인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온 세상이 된다고 하면 정말 성실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마땅하고,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하겠는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세상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안 계신 것처럼, 마치 사탄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악한 사람들은 잘 되고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은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렇게 정말 역전되어 있는 그 상황을 보면서 시편 73편의 말씀 가운데는 이 시편 기자가 정말 실족했다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 상황이 그 당시 그 옛날의 상황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도 똑같지 않습니까? 지금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의롭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고, 오히려 정말 악을 행하고 정말 탐욕적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면서 권력을 잡고 천하를 다스리면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 73편의 그 시편 기자의 고백이 어쩌면 우리들의 고백과 똑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73편의 내용은 그렇게 실망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만이 그 내용이 전부가 아니라, 이 시편 기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과연 의인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과연 악인을 어떻게 하실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에,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거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지금 당장에는 아니지만 당장에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온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시편 73편의 말씀은 소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죠. 대부분의 시편들이 처음에는 절망으로 시작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소망을 갖고 그리고 힘을 얻는 그런 내용들로 전개가 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런 시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똑같은 그런 위로를 얻을 것이 필요하겠다 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잘못된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관심을 두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면서 결국에 하나님께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것을 깨닫고, 아직 내 눈에는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감사와 찬송으로 결말이 지어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27절에서부터 28절은 이렇게 결말을 짓고 있습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니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 엉터리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얻고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하는 그런 고백으로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다음 74편으로 넘어가면 이제 그러니까 좋았다고 하는 얘기가 나와야 되는데, 74편에서는 더 정말 어려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74편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거죠. 시인이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당하고 정말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소망을 얻었는데, 이제 74편에서는 그 성전마저도 무너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시편의 제3권의 내용을 보면 탄식이 나오고 소망이 나오고, 또 탄식이 나오고 소망이 나오고 하는 내용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가다가, 88편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내용이 시편 88편에 나오죠. 시편 88편은 어떤 말씀인가? 대부분의 시들이 처음에는 절망하다가 나중에는 소망을 발견하는데 88편의 시편은 소망의 얘기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절망의 이야기만 나오죠. 찬양으로 이어지지 않는 어쩌면 유일한 시가 시편 88편인 것이죠. 89편에서는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는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지금, “어떤 소망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절망적인 이야기가 이 3권의 내용에 보면 절망적인 이야기, 그러면서 소망을 조금 이야기하다가 또 절망적인 이야기들이 쭉 나오는데, 그러나 이제 제4권으로 넘어가면서 그러한 상황들에 대한 대답이 제4권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제4권은 시편 90편에서부터 106편까지가 제4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시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해 주는 시들이 제4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오늘 읽을 말씀 시편 제90편은 모세가 쓴 유일한 시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 시편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그 다윗이라고 하는 왕이 등장함으로써 이 나라가 반짝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 이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있었고, 다윗 이후에 모든 것이 다 망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역시 다윗 이후에도 그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편이 시편 90편의 말씀이죠.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피난처가 되셨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라라고 하는 그런 권면의 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이후에 나오는 시편들은 이제 찬양시로 바뀌어져 나가게 됩니다. 물론 찬양이 중간중간에 나옵니다마는 이전에 있던 시들이 주로 탄식의 시였다고 한다면 사건을 들어서 그리고 5건으로 가면서 계속해서 찬양시가 등장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가진다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고요.


마지막 제5번으로 가면 5번은 107편에서부터 시편 150편까지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가운데 우리에게 형통한 길이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그 내용에 있어서 맨 마지막으로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하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시편 전체를 보면 처음에는 탄식이 나오지만 맨 마지막으로 가면 주님을 찬송하고 영광 올리는 시편으로 연결되는 그런 시편을 우리가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이 시편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도 때로는 정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늘 닥치게 되는 거.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늘 어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는 결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겠지만, 그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서 피할 길을 내시고 또한 도움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님을 발견하고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서 이 시편의 내용들이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한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늘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당하신 분이었다고 하는 것을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죠. 이 시편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을 당하신 내용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누구예요? 나의 동료, 나와 같이 포도주와 빵을 같이 먹었던 그 동료가 자신을 배반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그 이야기가 시편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우리와 같은 고난을 똑같이 당하신 그 주님을 시편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시편의 말씀을 보면 누가 하나님 전에 올라갈 수 있겠는가? 누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거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고 아무런 죄가 없는 정말 정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한 자들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고 노래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시편 24편 3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그랬습니다. 여호와의 삶 하나님이 계신 곳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조건에 맞으시는 분 한번 손 한번 들어주세요. 우리 가운데 누가 있나요? 없어요 우리는 늘 부족한 거죠. 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 시편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만한 그런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고 우리가 너무 연약한 존재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 일을 누가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해주신 거죠. 우리가 하지 못하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해주셔서 그래서 예수님이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그 의를 우리들에게 덮어 씌워주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게 만드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가신 그 길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구나 우리 주님이 여호와의 성산에 올라가신 유일한 분이시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고 계시구나 하는 사실을 또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이다?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읽을 수 있어야 되겠는데요. 특별히 이 시편 가운데 어떤 시들이 있냐면 제왕시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제왕시. 제왕시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왕을 찬송하는 시예요. 왕을 찬송하는 왕이 다스리시니 왕이 통치하시니 뭐 찬양하라 기뻐하라 뭐 등등 이런 내용의 시편들을 가리켜서 제왕시라고 하는데, 시편에 나와 있는 이런 제왕시들이 있는데 이런 제왕시들을 언제 불렀는가?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제 불렀는가 초막절을 지킬 때 장막절을 지킬 때 이 제왕시를 불렀다고 합니다. 초막절 제왕 장막절 이런 게 뭐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는 과정 가운데 이렇게 장막을 짓고 살았던 그것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가 장막절 초막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이 제왕시를 부르는 거예요. 왜냐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은 우리가 이 나그네의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 왕이 다스리시는 정말 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영화롭게 살 날을 기대하면서 부르는 게 제왕시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느껴야 되냐면, 지금은 이런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왕이 다스리는 것 같지 않아요. 마치 왕이 없는 것처럼 온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드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제왕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 왕이 통치하시니 하는 이것을 읽으면서, 결국에 우리의 마지막 때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바꾸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시편으로 우리가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에도 마지막 시편 마지막을 읽어나가게 될 텐데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온전하게 만드실 그날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이 말씀을 묵상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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