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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 중에 (히 13:1-2)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3장 말씀을 함께 읽었는데요. 히브리서 13장 1절 2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교훈해 주시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특별히 손님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2절에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잊지 마라. 손님 대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라. “손님 대접하는 일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라” 하는 그런 말씀이죠. 여기서 말하는 손님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를 의미하는 겁니다. 지나가는 나그네,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푸는 일을 우리 성도들이 잊지 말고 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손님, 나그네들을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그네가 아니라, 천사를 대접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잊지 말고 꼭 해라.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게 오늘 히브리서 13장 1절 2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들이 해야 할, 그러한 덕목 중에, 우리가 가져야 될 덕목 가운데, 나그네들을 대접하고, 나그네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굉장히 많이 강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렇게 나그네를 대접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에 대해서 정말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로마서 12장 3절 말씀에 보면, 1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나라 말로 아주 간단하게 “손 대접”하기를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손은 손님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들을 대접하고,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열심히 해라. 힘써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요. 로마서 12장이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서 앞부분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가운데, 여러 내용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나그네들을 잘 대접해 줘라. 나그네들에게 잘해주어라.”라고 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는 교회에서 가난한 과부들이 있으면, 그 가난한 과부들을 명부에 올리고, 그 가난한 과부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그런 일들을 했었습니다. 지금과는 좀 상황이 많이 달라서, 예전에는 고아나 과부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던 시절인데, 그 시절에 교회에서 과부를 명부에 올려서, 그분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일들을 교회가 했었는데, 그렇게 명부에 올릴 과부의 명단을 명단에 올릴 때, 어떤 과부를 올릴 것인가? 과부라고 해서 다 올리지 말고, 이런 과부를 명부에 올리고, “이런 과부를 도와주라”라고 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0절 말씀에 보면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무나 과부 명부에 등재해서 도와줄 게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이 믿음의 증거들이 많이 나타났었는가, 평상시에 얼마나 믿음에 따라서 살았는가를 살펴보고, 정말 믿음이 있는 참된 성도일 경우에, 그 사람을 명부에 올려서 도와주라고 할 했는데, 그 선한 행실을 보여주는 믿음의 그 덕목들을 쭉 열거하면서,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었냐면, 이 사람이 평상시에 나그네들에게 친절을 많이 베풀어준 그런 사람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라고 그렇게 교훈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들려주시는,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덕목들, 성도의 덕목들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베드로전서 4장 9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일을 불평하지 말고 원망 없이 불평하지 말고, 정말 열심히 하는 일을 권면해 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장로님을 세운다고 한다면, 장로를 세워서 교회를 다스리게 하길 원한다고 한다면, 그 장로가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 자격 조건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도, 그 사람은 나그네들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런 사람을 장로로 세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 말씀이죠. “그러므로 감독은” 감독이라고 하는 말은 장로라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그다음에 넣어 놓은 그 덕복 중에 하나가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이런 사람을 교회의 장로로 세워야 된다라고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고요.

역시 같은 내용의 말씀이 디도서 1장 7절에서 9절 말씀 가운데도 기록돼 있습니다. 장로에 대한 그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장로님들이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책망하는 일을 하게 될 텐데, 그 장로가 가져야 될 덕목, 여러 좋은 덕목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나그네들을 잘 대우해 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그런 덕목이 포함되어 있어서, 성경 여기저기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에 대한 강조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성도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쭉 말씀해 주시는 가운데, 너희 이스라엘 민족들은 나그네들을 잘 대우해 줘라. “친절하게 대해줘라”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9절의 말씀이죠.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전에 나그네 생활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들도 예전에 나그네가 아니었는가? 너희들도 예전에 그렇게 유리하면서 방황하던 그런 시절을 지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 시절을 생각하고 너희들은 너희들 안에 있는 나그네들에게 잘해줘라. 너희들 안에 들어와 있는 이방인들에게 잘해주라.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들을 보면 그렇게 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3장 1절 2절 말씀을 읽었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절 말씀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그 형제 사랑에 대해서 아주 특이하게 한 구절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히브리서 13장 2절 말씀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일들이 있었느니라.” 나그네를 대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천사를 대접했던 이야기를 예로 상기시키면서, 여러분들도 나그네들을 그냥 외면하지 말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는 삶을 살라고 권면해 주고 있는 겁니다.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그게 그냥 보통 나그네가 아니라 천사였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였죠? 예,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읽어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이 집에 있는데 자기 장막 가운데 있는데 3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3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그 사람들을 불렀어요.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우리 집을 지나가는데, 그냥 가지 마시고 우리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나그네들을 초대한 겁니다. 그들이 나그네들이 직접 찾아와서 뭘 요구한 게 아니라, 지나가는 그 나그네들을 보면서, 와서 우리 집에서 음식을 먹고 가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았어요. 빵도 구웠습니다. 정말 진수성찬을 차려서 이 3명의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대접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 사람들이 누구였어요? 천사들이었던 거죠.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접하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아브라함은 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셔드렸고, 그들에게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년에 당신은 아기를 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소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이제는 없어져버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던 그 가정에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고, 놀랍게도 그 천사들의 말에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이를 그다음 해에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나그네를 대접한다고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까 천사였던 것이죠.


아브라함만 그렇게 했습니까? 또 누가 있죠? 롯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도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그 지역에서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했던 이 세 천사들이 의 롯을 찾아갔습니다. 롯은 그 한 번도 보지도 못했던 이 정말 낯선 사람들을 보고서 친절하게 자기 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들을 아주 행패를 부리려고 했지만, 그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그 세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게 되었을 때, 천사들로부터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당신네 가족들은 빨리 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떠나라”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듣게 되어서, 만일 이 나그네들을 모셔드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함께 죽을 수도 있었던 이 롯의 가정이 이 나그네들을 모셔드림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고, 그 놀라운 메시지에 따라서, 이 롯의 가정이 구원을 얻게 되는 그런 놀라운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그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하면서 여러분도 나그네를 잘 대접해 주세요. 여러분도 나그네들을 그냥 외면하지 말고 손님 대접을 잘하십시오. 왜냐하면 나그네를 대접한다고 했다가 천사들을 대접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만일 우리가 우리도 나그네들을 대접하면, 그 나그네가 천사로 판명되는 일이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헷갈리시죠? 종종 우리는 드라마나 이런 만화나 이런 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종종 듣게 되는데요. 어떤 젊은이가 취업을 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어떤 불쌍한 노인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면접시험을 보러 가야 되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 노인을 도와준 거죠. 하지만 그 노인을 도와주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해 버렸고, 면접 시간에 늦게 됐어요. 오랫동안 간절히 소망하고 면접시험까지 보게 돼서 너무나도 좋았는데, 이 사람 때문에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면접에 늦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헐레벌떡 헐레벌떡 그 회사에 들어가서 죄송하다고 내가 늦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회사의 사장님이 아까 내가 도와줬던 노인이었다. 그래서 합격을 했다. 그런 드라마 혹시 본 적 있습니까? 아마 많이 봤을 것 같습니다.

또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죠. 어떤 사람이 어떤 자매랑 사귀게 돼서, 이제 드디어 장애인 장모될 분에게 인사하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차려입고 장애인 장로들 분에게 좋은 점수받기 위해서, 말끔히 차려입고 길을 가는데, 가다가 누구랑 부딪혔어요. 그래서 지금 마음이 급한 겁니다. 지금 내가 잘 보여야 될 텐데 옷이 망가져버렸어요. 그래서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아주 거칠게 대하고, 그냥 기분 나쁘다고 하면서, 어떻게 빨리 정리하고, 그래서 열심히 달려들어가서 만나려고 했더니, 아까 그 사람이 장인 장모 예비 장인 장모여서, “결국 깨졌다”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게 된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야기예요. 혹시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보신 분 계십니까?


아마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런 일들은 아마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줬다고 해서,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알고 봤더니 천사였다. 알고 봤더니 사장님이었다. 이런 정말 신기한 일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실제 삶 가운데서는 아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정말 이렇게 드라마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 20%가 될까요? 아니요. 아마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과연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요?

사실 여기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지나가는 손님들, 지나가는 나그네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 불러들여다가 친절하게 대접해 주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신약시대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상황, 3천 년 전 4천 년 전 저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나그네들이었고 고아였고 과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항상 가장 힘든 사람의 예를 들 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고 하는 말이 짝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제일 힘든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꼭 이런 사람들이 힘든 사람인가요? 아니에요. 요즘 과부들은 잘 삽니다.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아요. 저도 빨리 죽어줘야 되는지 (고민인데요. ㅎㅎ) 그 당시에는 나그네가 정말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낯선 곳에서,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세상에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어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기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나그네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 우리가 이해해야 되냐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난하고, 여러 가지 아픔을 만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랑을 베풀다 보면,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이 천사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임금님이, 마지막 날에 만유의 주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게 될 텐데, 양 같은 사람, 염소 같은 사람으로 구분하게 될 텐데,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구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임금님이 칭찬을 해요. 칭찬을 하면서, 뭐라고 칭찬하냐면, 마태복음 25장 35절 36절 말씀에 이렇게 칭찬을 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그렇게 힘들었을 때, 너희들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일을 해줘서 너무 고맙다. 내가 정말 배고팠을 때 너희들이 나에게 빵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들이 나에게 옷을 입혀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어서 정말 정체 없이 떠돌 때, 너희가 나를 영접해 주었다고 하면서, 그 양과 같은 성도들을 향해서 축복해 주는 이야기를 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이 양과 같은 사람들이 임금님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주님 언제 주님께서 배고프셨습니까? 언제 우리가 대접해 주었다는 말입니까? 언제 옷을 입혀주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임금님이 무슨 대답을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0절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라. 가난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에게, 불쌍한 자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그것이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이죠.


정반대의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염소 쪽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너희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라고 책망할 때, 그 염소 쪽에 있던 사람들이 대답을 합니다. 주님 언제 주님께서 배고프셨습니까? 주님께서 언제 힘들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도와줬을 텐데, “우리가 주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주님께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똑같은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게,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이웃들을 잘 대해주고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어야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다 보면 어쩌다가 천사를 만날 확률이 1%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 우리 성경 전체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바로 우리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우리 주님에게 한 것과 똑같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누구를 만난 것 같이 생각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주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주님을 대하듯이 주께 대하듯이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에 사람 얼굴 한번 보세요. 누굽니까? “우리 주님이 내 옆에 계시는구나.” 주님께 하듯이 해야 됩니다. 주님께 하듯이 해야.

성경을 보면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가? 주님을 대하듯이 대하라고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누구를 대하듯이 대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22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누구께 하듯? “주께 하듯 하라.” 남편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대접해야 된다는 거예요. 복종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내들만 그래야 되나요? 남편들은 안 해도 되나요? 아니요. 남편도 아내를 볼 때 내가 주님을 대하듯이 사랑하고 복종해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어떻게 복종하라? “피차 복종하라.”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하고,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그분에게 주님께 하듯이 해야 된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고, 우리 자녀들은 우리 부모님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복종해야 돼요. 왜 복종해야 됩니까? 주님께 복종하듯이 복종해야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말씀에 보니까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볼 때, 주님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면, 직장에 있는 상사들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누구처럼 생각해야 돼요? 주님으로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6장 5절의 말씀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누구에게 하듯?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나보다 연약하고 불쌍한 그런 사람들에게 한 것도, 사실은 주님에게 한 것과 똑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을 섬기듯이 섬겼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일할 때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듯이 그 사람 가족들을 섬기게 되었어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절망하고 신세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 감옥 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 하듯이 섬기게 되었던 것이죠. 어디든지 주님이 계시다고 믿고 섬겼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너무나도 매정하고,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너무나도 자기밖에 모르는 탐욕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비난을 너무나도 많이 들어요.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너무나도 우리가 미성숙한 모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친절하게 모든 사람들을 주께 대하듯이 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어요. “최고의 전도법은 이 세상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라고 SNS에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들 좋아요. 멋져요. 맞아요. 공감 표시를 막 하는 걸 봤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느끼고 있는 그런 내용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사실은 그렇게 잘할 수 없어요.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아는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아는데,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예요. 우리는 사랑하기보다는 내가 사랑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이해받기를 원하고, 위로하기보다는 내가 위로받기를 원하고, 인내하고 참기보다는 쉽게 분노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죠. 아니 힘들고 어려운 가난하고 불쌍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베푸는 것은커녕, 정말 사랑해야 될 우리 가족들을 향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한 말을 쏟아내 버리고, 정말 사랑해야 될 성도들 사이에서 사랑하기보다는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만일 우리가 정말 모든 사람들을 주께 하듯 할 수 있고 정말 우리가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만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도무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저도 못해요. 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서, 순간적인 분노에 휩쓸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런 너무나도 연약한 심성을 가진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사랑해 주셨고, 우리의 그 연약한 것들을 씻어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께 하듯 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우리가 차원이 다른 근사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좀 다른 어떤 멋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도 똑같은 죄인들이고, 똑같이 연약한 죄인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던져야 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기도의 제목이 이것입니다. “주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분노했던 것,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을 가지고 있던 것 용서해 주시고, 오늘 형제 사랑하는 것을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가난하고 연약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향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매몰차게 살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걸 기억하며 주께 하듯 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늘 넘어지기 때문에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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