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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승리할까? (잠 17:15)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잠언서 17장 15절의 말씀에서, 그런데, “그렇게 악인을 의롭다고 말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지극히 혐오하신다.”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을 우리가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이 저녁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판결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판결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죠. 판결이 있어야 판단이 있어야, 그래야 우리의 삶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매 순간순간마다, 이게 맞는가? 저게 맞는가? 그런 판단의 연속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축구 경기만 해도 그렇죠. 축구 경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 있어서,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그 매 순간순간마다 정확한 판단을 해주어야,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그래야 축구 경기가 진행이 되는 것이죠. 볼이 라인 밖으로 나갔는데, 그 라인 밖으로 나간 그 볼을 어느 팀에서 가지고 공격을 할 수 있는지, 공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심판은 빨리 판단해 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친 플레이가 나왔을 때, 이것은 정상적인 플레이인지, 아니면 파울인지, 판결해 주어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보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게 오프사이드인지, 온사이드인지 판결해 주어야 합니다. 볼이 공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게 되면, 이게 완전히 들어가서 골로 인정이 될 것인지,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라인에 걸쳐서, 골이 아닌 것인지를 판단해 주어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45분 경기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의 연장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도대체 몇 분을 더 뛰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언제 경기를 끝내야 하는지, 매 순간순간 판단의 연속에 의해서 하나의 축구 경기가 완성이 된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축구 경기뿐만이 아닙니다. 야구 경기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볼을 던졌을 때 이것이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온 것인지, 볼인지, 이것을 쳤을 때 안타인지, 파울인지 결정해 주어야 합니다. 라인을 따라서 가다가 이게 안쪽으로 들어온 것인지, 밖으로 나간 것인지, 공이 흘렀을 때 이것이 홈런 그 폴대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밖으로 나간 것인지, 또한 볼을 던졌을 때 선수가 뛰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 선수가 아웃을 당한 것인지, 세이프인지, 매 순간순간마다 판단의 연속에 의해서, 야구 경기가 진행이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도 역시 판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밥을 짓는 것만 해도 그렇잖아요? 밥을 지을 때 어떻게 밥을 짓습니까? 쌀을 얼마만큼 퍼야 하는지, 우리가 이 쌀을 어느 정도를 해야, 우리 식구가 다 만족스럽게 먹을 것인지, 양을 적절하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쌀을 씻을 때, 어느 정도 씻어야 이물질이 없어지고, 그리고 깨끗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을 어느 정도 넣어야 되는 것인지, 그리고 밥을 지을 때, 그 시간을 어느 정도 기다려야 되고, 뜸을 얼마나 들여야 되는지, 불을 얼마나 세게 해야 되는지, 모든 것들이 다 판단을 해주어서,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다 그 판단에 맞게 진행해 나가야 밥이 되는 것이죠. 제가 음식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어떻게 판단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대체 라면을 끓이면 물을 얼마큼 집어넣어야 될 것인지, 수프를 지금 집어넣어야 되는지, 나중에 집어넣어야 되는지, 파를 언제 넣어야 되는지, 매 순간순간마다 결정을 해야 되는데, 결정해야 될 그 모든 것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음식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두렵고,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뭘 해야 될지 모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매 순간순간마다 판단과 판단 또 연속된 그 판단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인데요. 우리의 삶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바른 판단이 있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판단들이 제대로 된 판단이 연속으로 이어질 때, 우리의 삶이 편안하고 안정된 그런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의 기술의 발달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그런 판단들을 미리 다 셋업해 놓아서, 정말 초보자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미리 판단을 정해 놓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래서 너무나도 좋습니다. 밥을 지을 때 예전에는 불에 밥을 지었지만, 요즘에는 전기밥솥에 넣으니까, 집어넣고 단추 누르고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판단을 다 알아서 해서 밥이 나오는 거예요. 세탁기에도 세탁물을 집어넣고, 물론 거기에 어느 정도 집어넣어야 되는가 등등 여러 가지 판단할 게 있겠지만, 세탁기가 알아서 빨아주니까 많이 편리해지는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청소기도 로봇 청소기가 있어서, 알아서 청소해 주는, 내가 일일이 판단하지 아니해도, 모든 것들을 다 판단을 미리 다 입력해 놓아서,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게 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언제 문제가 생기는가 문제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바른 판결이 아닌 잘못된 판결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오게 될 때, 고통스러워지고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아시안컵 경기 때 중국의 마닝 심판이, (그 사람의 이름을 이름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 마닝 심판이 우리나라와의 경기 가운데서 편파 판정을 해버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아요. 공정해야 될 심판이 대놓고 편파 판정을 해서, 그래서 경기를 망쳐버렸는데, 그런데 아무런 징계도 없고,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고 괜찮은, 그냥 그것이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그대로 끝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 너무나도 허탈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프로야구 경기를 종종 보고 했었는데요. 미국의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경기를 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는 12회까지인가밖에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미국의 프로야구는 경기가 결정지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야구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9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5회가 되기도 하고, 18회가 되기도 하고, 최장 기록이 26회까지 간 야구 경기가 있다고 했는데, 제가 예전에 필리스 경기, 필라델피아 필리스 경기를 보는데요. 밤 1시 2시가 되는데도 경기가 안 끝나는 겁니다. 18회에 막 이렇게 넘어가고 그러는데도, 경기가 안 끝나요. 그런데 아마 18회 말이었던가 그랬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안타를 쳐서, 3루에 있던 주자가 홈으로 다 달려드는데, 수비가 볼을 던져서 홈에 볼을 던진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정확하게 잘 던졌어요. 그리고 그 주자를 딱 태그 해서 아웃시키면 되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리고 아직 주자는 홈플레이트에서 들어오지도 않고, 저 멀리 아직도 한 두세 걸음 멀리 떨어져 있는 거기서 이렇게 뛰어오고 있는데, 18회 말 정도 되니까 심판이 아직 홈플레이트 받지도 않았는데, “세이프” (선언해서) 그래서 경기를 끝내버렸어요. 예전에 리플레이도 없던 그 시절인데, 리플레이도 없던 그 시절에 심판이 너무나도 힘들었나 봐요. 집에 가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그렇게 끝내버리고, 허무하게 경기가 끝내서, 그런데 심판의 그 말을 번복할 방법도 없고, 그다음 날 인터뷰를 하는데 경기를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를 표하는 것을 보고 허탈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심판을 내리는 자가 정당하게 공평하게 판정을 내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잘못된 판결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어디서만 일어나는가? 이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내에서도 재판이 있는데, 그 재판 가운데 정말 공평하게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잘 가려서 바른 판결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바른 판결이 아니라, 모종의 힘에 의해서, 어떤 연관성에 의해서, 엉터리 판결들이 막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요.

이 세상의 재판도 역시 마찬가지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그런 엉터리 재판들이 있는 것이고,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증거를 조작해서 그래서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작은 잘못을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판결을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 반면에,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그냥 유야무야 지나가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발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판결을 하면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판관들만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판결을 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판단을 하는 것이고, 언론이 사건에 대해서 판결을 해서, 자기들의 입장에 따라서 보도를 하는 것이고, 또한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다 판결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진공 속에서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들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편파적인 존재가 바로 인생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잘못된 판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a라고 하는 것과 b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하는 그 판단자가, 그 판단자는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재판관이 될 수도 있겠고, 축구 심판이 될 수도 있겠고, 언론이 될 수도 있겠고, 아무튼 모든 그 판단자들이 과연 a나 b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객관적 판단자일 수 있겠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거예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겁니다. 이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다른 것이고, 이 사람이 노인인가 젊은이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고, 이 사람이 유색 민족인가 백인종인가에 따라서 다른 것이고, 자기가 태어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성향에 따라서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배경들을 가지고서 판단을 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처음부터 편파적인 판정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놓여져 있는 것이죠. 우리가 호남 사람이냐 영남 사람이냐에 따라서, 우리가 저 제3세계 사람인가 이 대한민국 사람인가, 아니면 저 북한 사람인가 저 사람이 종교를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판단들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다음 그림을 보자고 한다면 이것이 더 바른 것인데요. 판단자가 객관적으로 a와 b와는 관련이 없는 객관적인 중립적인 지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판단자는 어느 한 편에 같이 소속되어 있는 겁니다. 노란 편에 있는 판단자는 노란 변의 a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그 말로 그래서 유리하게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와 다른 나와는 다른 파란 지역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수많은 잘못된 판결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잘못된 판결들이 넘쳐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런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 함부로 쉽게 우리가 그 판단에 그냥 끌려다니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모든 판단은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정말 옳은 진리의 판단이 아닌 것이죠.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판단들이 수없이 많이 널려져 있는 겁니다. 수없이 널려져 있는 이런 잘못된 판결들이 널려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러한 판단들을 보거나 들을 때, 그냥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과연 이것이 진정한 판결인지, 제대로 된 판단인지, 조심해서 분별해서 그 모든 것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일 만한 지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팔랑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누가 좋다고 하면 좋은가 보다 하고 따라다니고, 이것이 좋다고 하면 이것이 좋다고 따라다니고, 그것이 좋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배경에서 그 말을 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무비판적으로 그냥 따라다니다가는, 결국 손해만 보고, 여러 가지 것들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피해를 당하게 될 가능성이 많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어떤 텔레비전에 어떤 박사님이 나와서 어떤 식품을 선전하면서, 어떤 약품을 선전하면서 이것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어떠한 질병에 정말 좋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까? 한 번쯤은 다시 체크해 보고 과연 그러한가 하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 게 맞죠? 박사님이니까 무조건 믿으면 되나요? 어느 텔레비전에서 어느 식당이 맛있다고 이야기하면 그 식당이 정말로 맛있을까요? 그냥 맛있다고 하는 것인 것뿐인가요? 제가 페이스북으로 종종 식당에 대해서 이 집이 맛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느 날 제 친구가 와서 물었어요. 여기 우리 교회 옆에 있는 중국집 이 식당이 정말 맛있는 집인데, 그 집을 알고 있으면서, 당신도 와서 이렇게 잘 먹으면서, 왜 페이스북에는 그 식당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을 하지 않았냐고 제게 물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페이스북에 선전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내가 줄을 서야 될까 봐 얘기를 안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페이스북에 식당 맛있다고 올린 집은 그게 무슨 집입니까? 그건 우리 교인 집입니다.

누가 좋다고 하면 왜 좋다고 이야기를 하는지, 누가 좋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왜 좋다고 이야기하지 않는지, 그 사람이 어떠한 생각에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마음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 사람을 분석해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쉽게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와인 회사에서 후원한 후원을 받는 와인 연구학자가 나와서 와인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정말 좋은 것이기 때문에, 매일 한 잔씩 마셔야 된다고 말을 하면, 그 말을 믿어야 될까요? 믿지 말아야 될까요? 와인이 좋은 게 있을 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 와인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가 사실은 와인 회사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으면서, 와인의 장점에 대해서만 연구했던 학자라고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호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판단들이 다 그렇습니다. 언론에서 말하는 것이나 재판에서 판결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것들이 공정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때때로가 아니라 정말 너무나도 많이, 잘못된 판결, 악인을 의롭다 하고 하고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그런 엉터리 판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잘 분별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렇게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들을 호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이용을 당하고 우리가 착취를 당하게 되는 그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항상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무조건 의심하면서 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의심하면서 모든 것들을 다 불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연 그 뒤에 있는 그 의도가 무엇이고, 그 말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유익이 무엇을 노리고서 하는 말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분석해 볼 필요가 없다는 필요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른 판결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잘못된 판결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판결을 해야 되는가? 우리는 바른 판결을 내려야 되는 것이죠. 우리는 악인을 악인이라고 말하고, 의인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그런 바른 판결들을 내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15절의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괜찮다”가 아니고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증오하신다는 거예요. 그런 악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정말 악인은 악인이라고 판단을 내려줘야 되고, 의인이라고 판단을 내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서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그런 나쁜 판결을 할 게 아니라, 정말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재판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판결을 안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판결의 연속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의 삶은 매 순간, 매 순간마다 판결을 하면서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판결,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내리는 판결 등등, 여러 판결들을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판결을 내릴 때, 어떤 판결을 내려야 될 것인가?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속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법조 카르텔은 너무나도 탄탄해서, 서로 짜고서 돈을 받고 뇌물을 받고, 그래서 형량이 가벼워지고, 또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꾸기도 하고, 온갖 잘못된 일들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먹이를 주고받고 하는 그런 사이이기 때문에, 그 법조 카르텔이 탄탄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 잠언서 17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고, 하나님이 무엇을 미워하시는가? 그런 잘못된 판결들을 미워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악한 판결을 내린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정의로운 판결, 옳은 판결, 선한 판결들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의 말씀에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오늘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판결을 하면서, 그리고 나쁜 판결을 막 해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벌거벗은 것처럼, 우리의 그 치부까지도 다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내립니까? 왜 우리는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이죠?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이익 때문에 그렇습니다. 뇌물을 받기 때문에 그 뇌물에 눈이 멀어서, 악인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의인을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뇌물뿐만 아니라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의인을 악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권이 걸려 있고 뇌물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 일반인들 같은 경우에는 왜 거짓말을 합니까? 왜 잘못된 판결을 내립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거짓의 편에 서서, 거짓말로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진실하게 증언을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게 증언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렇게 잘못된 일에 동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이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할까 봐, 내가 정말 정의롭게 행동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이 공동체에서 쫓아낼까 봐, 그러면 내가 정의의 편에 선다고 했다가, 결국에는 나만 왕따 당하게 되는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악을 보고도 이것이 악이라고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의를 보고도 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내가 정의롭게 이야기하면, 놀랍게도 아 박수 쳐주고 환영해 주고, 같이 힘을 모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따 시키는 게 이 사회의 분위기예요. 저 사람은 자기가 잘났다고 저러는구나. 공동체의 이 화평을 깨뜨려버리는구나 하면서,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를 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이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악에 대해, 악을 보면서 침묵해 버리고, 의인을 오히려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거꾸로 된 그러한 행동들을 하는 일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의식 중에 우리가 잘못 판단하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죠. 우리는 객관적으로 진공 속에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정당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 아까 그림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해 있어요?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동양인이고 그리고 우리는 호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기독교인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속해 있는 그 그룹에게 호의적인 판단을 하기가 쉽고, 그러나 우리와 대척점에 있는 저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타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그리고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좋지 않은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이지 않고, 내가 자라온 이 환경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편파적인 판정을 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국 심판은 왜 심판을 볼 때 그렇게 편파적인 판정을 하는 겁니까? 자기 나라에 유익한 것이고, 또한 돈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항상 잘 된 정당한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언젠가는 내가 속해 있는 것 때문에 잘못된 판단, 의롭지 못한 판단들을 할 가능성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늘 엎드려야 되는 것이죠. 주여 진실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더욱더 잘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완벽하지 않고, 내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게 모든 완벽한 지식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스스로의 자기 성찰을 통해 내가 잘못 판단을 했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그 전제 속에서, 더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부담 많은 노력을 해서, 우리가 의를 의롭다고 하고 악을 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입니다. 악인을 의롭다고 판결을 내리고 의인을 악인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로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요. 의는 망하는 것 같아요. 뭘 해도 아기는 다 잘 돼요. 의인은 늘 망해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절망하고 낙망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죠. 세상이 왜 이러냐?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절망하는 거죠. 또 하나의 길은 무엇이냐 하면, 그 악에 동조하는 것으로 전향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의롭게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구나. 저 사람들이 힘이 있는 것이고, 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 편에 붙어서 살아야, 그래야 내 입에 풀칠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살 수 있는 것이다고 하면서 악에 항복해 버리는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우리 모두는 그런 낙망하거나 악에 항복하는 그런 판단을 할 게 아니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결단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잠언서 17장 15절 말씀 때문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아무런 제재 없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영원히 계속 잘될 것 같아죠. 그들이 영원히 떵떵거리면서 수십조 수백 조의 돈을 벌어가면서 그리고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면서 악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결국 최종의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줄로 믿습니다. 1심 2심 3심 대법원에서 판결하면 그게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법원이 있습니다. 어떤 법원이죠? 하늘나라의 법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 재판, 종교 재판에서는 다 질 수 있어요. 이 세상의 재판에서는 악이 승리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서 소문은 소문들을 통해서, 악한 자들이 내뱉는 그런 소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판결들은 악인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의인을 악인이라고 말하는 판결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가 정말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대법원이 끝이 아니고 이 세상의 재판이 다 끝이 아니고 사람들의 판단이 다 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셔서 그 보좌 위에서 영원한 심판을 하실 그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그냥 마지막 날에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거다 생각하고, 그냥 내 팽개쳐버리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잡아야 되겠고, 그 바로잡는 노력들을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노력이 전혀 소용이 없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을 겁니다. 정말 황당한 결과들을 우리들이 많이 받아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가 절망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불어주시고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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